FSS 13, 14권 책들이 쌓인 방






  FSS가 리부트되었을 때, 나도 짜증이 팍 났었다. 그건 웹상에서 소개되는 로보트들 디자인이 영 보기 흉해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나가노 마모루의, 남들한테는 지 설정을 가상 세계의 절대적 사실로 받아들이길 요구하면서 작가 스스로는 이야기 안에서 최소한의 일관성도 지키지 않는 태도가, 그것도 30년 넘게 이어오면서 쌓여온 자잘한 짜증이 리부트라는 큰 한 방으로 폭발해 버렸기 때문이다. 자기가 선수로도 뛰고 싶어하는 심판이나, NPC한테 지나치게 감정이입하는 게임 마스터의 주도 하에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이딴 게임은(게다가 주최측에서 도대체 언제 끝나는지 알 수도 없게끔 판을 벌려놓았는데) 더러워서 못 뛰겠다 싶었다.


  그런데 미운 정으로 어찌저찌 구입해 본 13, 14권은, 이게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적어도 '마도대전' 추가 이후 매너리즘에 빠져 한없이 너절해졌던 9권 이후의 전개보다 훨씬 나았다. 11/12권에서 13/14권으로의 (중간에 말도 안 되는 애니 기획도 한 번 끼어들면서) 변화를 생각하면 리부트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는 느낌이다. 11, 12권의 이야기가 특히 더 후지다기보다, 11, 12권의 이야기는 리부트된 디자인이 더 일관성있고 어울린다는 말이다. 특히 14권의 베라 공방전 이야기는, 뭔가 '슈퍼로봇대전' 에피소드 같은 정신없는 올스타전이면서 나가노씨 특유의 산만함도 적고, 캐릭터들의 밸런스도 잘 지켜진 좋은 이야기였다. '시바레스' 에피소드 이후 '드래곤볼'마냥 한없이 파워 인플레되어 걷잡을 수 없어지던 분위기에서 개그로 한 발짝 물러나, 모처럼 균형잡힌 '옛날이야기'를 해주었다. FSS의 매력은 원래 이런 것이었다. 쓸데없이 똥폼잡는 설정놀음이 아니라.

  그리고 디자인 면에서도, 실제 극화된 것을 보자니 생각보다 매력이 있다.
  인터넷에서 설정화 같은 것을 줏어볼 때는 참 무슨 로보트가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생겼지, 싶었는데... 생각해 보면 16미터짜리 이족보행 기계들이 수십, 수백 대씩 날뛰는 세상 아닌가. 이상하기로 따지자면 멋만 잔뜩 부린 듯한 예전 디자인의 모터헤드들이 더 말도 안됐다. 광선검이 총보다 우월하고 일본도가 광선검보다 우월하다고 빡빡 우기던 초창기부터 말이다. 지금처럼 아예 사람같이 생기지 않은 로봇들이, 인간의 것과는 전혀 다른 관절구조와 신체 움직임을 가지고 싸워대는 편이, 말도 안 되기는 마찬가지이면서도 뭔가 300살 넘게 사는 외계인 세상의 이야기라는 실감도 더 나면서 독특한 미학이 있어서 새롭다. 실검과 발사무기로 동시에 쓰인다는 '거트 블로우' 설정이 특히, 일본도와 광선검이 킹왕짱이던 예전 디자인과 비교해서 훨씬 설득력이 있고 보기에 좋았다.


  어차피 '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가상신화'라는, 20세기에나 유행하던 설정놀음 게임을 여적지 그런대로 재미나게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통한 노릇이다. 그런 식의 게임이 이제는 한물 간 아재들 놀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아무 생각 없이 즐기면 나가노의 연출과 디자인에는 아직도 신선한 부분이 있고 즐길만한 매력이 있다. 특히 '신의 의지와 세상의 종말 이야기'를 중2병스러운 비극 정서가 아니라 일종의 부조리 개그로 접근하는 부분은 그래도 나가노가 난놈은 난놈이라고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면서 즐겨 보게 해 준다. 큰 거 안 바라니까 괜한 오버 없이, 더 이상의 파워 인플레 없이 (하여튼간에 '초제국' 이라는 단어를 각 잡고 쓰기 시작하면서 이 만화는 재미가 없어지기 시작했었다) 전우주적 신화개그를 계속해주길 바랄 뿐이다. 20세기 서브컬쳐 영역에서 전무후무했던 '드래곤볼'의 세계가 21세기에 '공식적으로' 변주되는 참상을 목격하면서 비교하자면, 그래도 FSS정도면 괜찮게 늙어가고 있는 '고인물'이라고 평가해줘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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