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손원평) 책들이 쌓인 방


  '뇌 기능 장애로 인해 선천적으로 감정 교류에 문제가 있던 고등학생 소년이, 역시 성장 과정이 평범하지 못했던 같은 반 친구와, 첫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한 여자애를 만나게 되면서 진짜 감정을 느끼게 되기까지의 성장담' 이라 정리될 만한 내용. 감성적이면서도 깔끔한 문체로 잘 쓰여진 청소년 성장담인데, 꼬인 시각으로 보자면 '완득이'식 기성품 성장소설이라 냉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깔끔한 기성품이야말로 선정적인 문제작 이상으로 쓰기 어렵고, 실제 청소년들에게 큰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인상깊었던 것은 이 이야기가, 주된 세일즈 포인트로 홍보되는 '감정이 메마른 시대, 성장하지 못한 우리들의 한 자화상' 내지 '평범하지 못했던 한 소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정상-비정상에 대한 통념적 기준 문제' 로는 잘 읽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비판적 자화상이라고 하기에는 주인공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때로는 감정 과잉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온정적으로 감정 이입돼 있어서 '감정의 메마름'이라는 주제가('아몬드'의 주인공이 과연 진짜로 감정이 메말랐던 것인지 자체가 나는 의문이다) 보편화되기 어려워 보였다. '정상'을 과도하게 중시하는 우리 사회 통념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건 맞는데, 뒤로 갈수록 그것보다는 다른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어서 작품의 핵심 코드라고 하기 어려워 보였다.


  오히려 내가 보기에 이 이야기는 또 다른 '예수의 구원기'였다. 12월 24일에 태어났다는 주인공은, 아무리 봐도 사회의 온정으로 보듬어져야 하는 희생자이기는커녕, 스스로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타인에게 무관심하기 짝이 없는 이 세상의 죄많은 중생들을 비추는 거울이자, 결국에는 그들을(적어도 그들 중 일부를) 각성시키는 구원자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조금 마이너하게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는 공감의 메신저, 아니 메시아랄까. 처녀 잉태를 연상시키게끔 유복자로 태어난 주인공은 무지한 주변인들에게 자잘한 수난을 받고, 그 중에 주인공에게 진심으로 다가오려는 일부 사람들에게 어떤 깨달음과 변화를 주며, 결국에는 '기적'을 일으킨다. 그 기적을 일으키는 과정도 '(타인의 죄를 대속하는 것 같아 보이는)자기 희생 -> 죽음, 내지 가사상태 -> 소생, 말하자면 다시 살아나심' 식으로 딱 예수님 스타일이다.
  뇌사 내지 식물인간 상태였던 엄마가 '거짓말같이 살아나는' 결말이 뜬금없어 보이는데, 주인공이 자기희생을 통해 '소통에 메마른 현대인의 죄'를 대속해주고 다시 살아나 기적을 일으킨다는 구원담 구조로 보면 의외로 필연적인 전개였을지도 모른다. '아몬드'는 주인공 자신의 말을 빌려 주인공이 대신 칼을 맞고 쓰러지는 대목이 이야기의 끝이며 이후 다시 살아나고 엄마와 재회하고 하는 부분들은 그냥 '후일담'이라고 규정하는데 이것도 어쩌면 딱 성경의 구도다. 작가는 첫 아이를 낳은 직후 이 소설의 초고를 썼다고 하는데, 어쩌면 작가에게는 갓 태어난 자기 아이가 이 세상의 구원자, 작은 예수님으로 보여서 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것일 수 있겠다.

  재미있는 건 '감정의 일부분이 고장나 있던' 주인공은 자기희생 사건 이후 평범하게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되었고, 그 이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억지로 말을 아끼면서 소설이 끝난다는 점이다. 어쩌면 주인공은 환자였다가 치유된 것이 아니라, 비범한 구원자였다가 구원을 이룬 후 평범해져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작은 세상 속 평범한 원 오브 예수가 만든 기적이 끝나고 다시 일상, 이랄까. 아니면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사는 것들 중 어떤 부분이 사실은 보이지 않는 기적, 누군가의 자기희생, 혹은 예수님의 은총 같은 것의 산물이라서, 그것이 가능해지기까지의 한 이야기를 보여준 후, 그것이 기적에 의해서 채워진 이후의 이야기는 그냥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는 것, 각자의 세상일 뿐이라는 작가의 메시지일 수도 있다.


  나는 믿지 않는 종교이지만, 기독교가 믿는 이들한테 주는 혜택 중 하나는 저런 이야기, 일상의 모든 것을 예수의 행적과 구원이라는 신화에 유비해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어느 날 기적처럼 나타난 자기 아이에게서 예수의 탄생과 재림을 떠올리고, 그것을 영감으로 우리 모두의 거울상을 보게 해주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생각해내었으며, 그럼으로써 우리의 소소한 일상과 감정들 이면에 미지의 기적과 은총이 있다는 믿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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