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 라그나로크(2017) - 전우주적 비극은 끝, 이젠 전우주적 희극으로 포스터가 걸린 방




  함께 본 사람은 중간에 졸았다. 그럴 만치 무게감이나 진지함은 얼른 느껴지지 않는, 비디오게임 데모 같은 영화였다. 고전의 신들과 오래된 영웅들이 디스코 조명으로 뽕짝뽕짝하는 비쥬얼이었다. 개그가 속도감있게 펑펑 터져줬지만 해당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해야만 먹히는 개그들인데다 너무 쉴새없이 터져줘서 사람에 따라서는 도중에 질려버릴 수 있었다. 또 사람에 따라서는, 북구 신화의 장엄함을 초딩 몸개그쇼로 전락시켰다고 화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내게는 대만족. 빠르고, 생각보다 정보량이 많으며, 구질구질한 면이 없다는 점에서 세련되었다.

  무엇보다 21세기 블록버스터에서 '라그나로크' 이야기를, 그것도 뉴욕의 마블 영웅들과 크로스오버해서 그리면서 이 이상의 선택지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이건 북구 신화가 아니라 마블과 디즈니 버전 코믹북 이야기일 뿐이야!' 라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토르: 라그나로크'야말로 북구 신화에 대한 가장 깔끔한 21세기식 해석이며, 바그너 이상으로 대중적이며 보편적인 신화 예술이다.

  과단성있지만 사악하고 잔인한 주신(主神)과 그 아들인 대중 영웅 신, 거기에 변절자 신과 세상을 멸망시킬 거인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21세기에 블록버스터로 그리는데 이런 코메디가 아니라면, 대안은 20세기에 버얼써 수만 번은 울거먹다가 땅끝까지 유치해진 중2병 스토리뿐이다. 그런 이야기로는 이제 '데빌맨' 이상이 되기가 힘들다. 게다가 이 쪽이 사리에 더 맞는다. 영생을 누리면서 심심풀이로 다른 세상의 거인과 싸워 세상을 지키는 영웅의 이야기라면, 그것이 현실의 상식과 사리에 맞으려면 코메디말고 뭐가 있겠는가? 천둥의 신과 지구 최강의 거인(헐크)이 "걔가 너 싫대!", "너는 더 싫대!" 수준으로 초딩싸움을 해대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게 캐릭터 붕괴가 아니라 캐릭터의 본질을 정확하게 살린 명장면이었다.


  전우주적 비극은 이제 먹히지 않는다. 그런데 그럼에도 전우주적 신화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지금 시점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은 전우주적 코메디이다. 오히려 거기에 세상에 대한 통찰을 더 잘 담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번 영화는 전우주적 거물들이 쉴새없이 자학개그를 시전하면서 중간중간 한두 마디씩 그럴싸한 통찰들을 툭툭 뱉는데, 이게 시커먼 중2병 판타지의 닭살돋는 대사들보다 훨씬 깊이가 있으면서도 생각해볼 거리가 있었다.

  특히 세상에 당면한 위기를 해결하는 일이 라그나로크를 전력으로 막는 게 아니라 오히려 라그나로크를 일으켜 버리는 방식이라는 발상 전환은 인상적이었다. 하기야 북구 신화에서 라그나로크가 없거나 일어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유니크함이나 매력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라그나로크를 두려워하면서도 기다리는 마음'이야말로 역으로, 어스가르드 세상의 모든 모순과 문제를 낳는 원흉이 아닌가? 최소한의 휴머니즘을 지킬 수 있다면 오히려 라그나로크를 현세에 일으켜 보여주는 게 세상의 붕괴를 막는 일이라는 역설이, 특유의 개그도 슬슬 물려지기 시작한 영화 종반부에서 신선한 자극과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토르와 로키가 어스가르드 유민들을 이끌고 신천지를 찾아 떠나는 결말도 북구 신화의 설정 붕괴가 아니라, 오히려 원전의 충실한 '번역'이라고 나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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